
[生命있는 韓國敎會 福音의 靈驗 證言史]
<73>趙順天 성경학교장의 施敎
平神의 聯盟흡수 반대 등 압력 묵살
조국해방의 종소리가 울리던 날, 1945년 8월15일 이날에 온 겨레는 감격의 눈물을 홀리면서『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많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만세』의 애국가를 목메어 불렀다.
그렇지만 이때에 부른 애국가는 흔히 구곡이라 불리우는 남의나라 스코틀랜드 민요곡이어서 서운한 감이 없지않아 있었다. 그런고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세계적인 음악가 안익태(安益泰)의 작곡을 채택하여 남한 각지에서 널리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에서의 사정은 무신론 공산주의 체제가 강화 되면서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 외에는 부르지 못하게 하였으며 하나님이 보우하사의 애국가는 얼마안가서 없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국에서 조순천 목사는 남한의 방송을 비밀히 들으면서 들려오는 애국가의 신곡을 재빨리 오선지(五線紙)에 옮겨 교회에서 또는 학교에서 몰래 부르게 하였다.
음악하는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맑고 정직하고 의리가 있으며 충직한 점이라 하겠다. 조목사는 그러한 면에서 전형적인 음악인이었다. 조목사는 1907년 평남 대동군(大同郡)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믿음 좋은 아버지의 권유로 장로교계통인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음악을 배웠던 것이다. 홍난파, 김인식 등 유명한 음악가들이 이 학교에서 배출되었다.
그는 계속하여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로 진학하였다. 그리고 다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그는 졸업하기 직전에 평양신학교와 여자신학교가 연합하여 하는 음악회를 개최하여 교회지도자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졸업 선물로 받은 풍금은 자신의 시무처인 대성교회(台城敎會)에 기증하여 풍금목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 풍금은 희귀하였다.
조순천목사가 득신학교(得信學校)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39년10월 진남포(鎭南浦)억양기교회를 담임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일제의 한국교회 탄압이 극심하여 기독교계통 학교인 득신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문을 닫게 되어 조목사와 학교와의 관계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해방되면서 곧 득신학교는 문을 열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산당은 재빨리 득산학교를 중등교원양성소로 만들어 기독교 학교의 재건을 봉쇄해 버렸다.
조목사는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영감으로 내려진 계시는 『건물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진짜의 신앙교육은 교회당에서 하는 것이 더 좋으리라』이었다. 용기를 얻은 그는 평서노회(平西老會)로부터의 인준을 얻어 진남포 비석리교회(碑石里敎會) 1층과 유치원을 사용하기로 하고 1946년 10월 득신고등성경학교라는 간판을 걸고 개교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이듬해 4월 북한정권 당국으로부터 지시가 왔다.
①김일성 초상화를 교실마다 걸어야 한다.
②교과목 중에 인민과(人民課)롤 넣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 교장으로 있은 조순천목사의 태도는 완강하였다. 그는 한마디로 다 거절하고 말았다.
1949년 10월 북조선정권의 서기장으로 있은 전직목사 강량욱이가 찾아와 회유와 강압을 병행하면서 다음의 사항을 제시하였다.
①평양신학교와 감리교의 성화신학교가 합동하여 기독교신학교로 개편하게 되었으니 득신학교는 여기에 호응하여 예과로 개편하도록 하시오.
②교직원은 기독교도연맹 가입자라야 한다.
③학생들은 기독교도연맹 추천자로 받도록 하시오.
조목사는 1946년 평서노회장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선언으로『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결의 한바 있었다. 그러한 그 가제의에 응할 까닭이 없었다.
그해 12월에 평양신학교 이사회가 소집되었다. 기독교도 연맹 신학교로 하자는 안이 나왔으나 조목사는 안주노회 한덕교 목사와 함께 동의 재청으로 반대하였다. 이것이 좌목이 되어 그는 12월17일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되어 갔으며 고문과학대로 순교하였다.
金光洙<서울山亭峴敎會 목사·한국교회사 硏究院長>